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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쓰지 않는 글쟁이
나와 같은 직군은 글쟁이처럼 일을 한다. 수많은 정책들을 글로 표기해야 했고, 우리가 만들어야 하는 기술적인 요구사항, 디자인 요구사항 등 RFP1 수준의 기획서를 쓰는 데에 많은 공을 써야 했다. 누가 읽어도 같은 그림을 그리며 상상할 수 있어야 했다. 또 사업을 기획할 때는 사업성을 이야기할 수 있어야 했으며 그 문서를 읽으면 내가 어떤 기대를 갖고 있고 어떤 문제를 해결하려는지 알 수 있어야 했다. 어떤 일의 시작점에서 끝까지 끌고 가는 역할을 해야 했고, 시대가 변하고 흐름에 따라 중요하다고 느끼는 것들이 달라졌다. 사업계획서를 작성해서 예산을 받았고 그 사업계획서를 토대로 RFP를 쓰고 개발팀 팀장과 디자인팀 팀장과 함께 기획서를 나눠주고 발표 자료까지 만들어 공유했다. 그리고 일정이 어느 정도 잡히면 디자인 시작 전까지 스토리보드까지 만들어서 디자이너에게 전달했다. 디자인을 하며 변경되는 것들은 수시로 정리하고 매주 개발팀에 대신 전달했다. 개발이 되기 어려운 디자인이 나오면 다시 디자이너에게 수정을 요청해야 했다. 무수히 많은 반복을 해야 했었고 그렇게 매몰 비용을 늘리는 프로젝트를 하며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강해졌다.
사고 치듯 제출한 사업계획서가 큰돈을 벌어왔고, 그 예산으로 내가 직접 팀을 세팅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고 목적 조직을 구성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일하는 어떤 조직을 참고했던 것도 아니다. 그냥 지금까지 내가 경험했던 비효율을 깨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10년 넘게 기능 조직으로 일을 하던 곳에 작은 목적 조직이 생겼다. 그렇게 일을 5년 정도 계속하다 보니 익숙함을 넘어 당연함이 되었다. 자연스레 목적 조직으로 일하는 곳을 선호했고 이직을 할 때는 그런 조직인지를 먼저 살펴보게 되었다. 어쩌면 다시는 그 비효율을 경험하고 싶지 않았던 것도 있다. 기능 조직은 뭔갈 크게 해볼 수도 있고, 인재를 양성한다는 개념에서는 장점도 있지만 결과적으로 매몰 비용이 그만큼 크다는 단점이 너무 크다. 이 단점이 갖는 시간 낭비에는 내 시간이 포함된다. 그 시간이 너무 낭비라고 느껴졌다. 내가 경험하고 알고 싶은 것들이 너무 많은데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알게 되는 것도 싫었다.
애자일과 린은 사실 별것 아니다. 우리가 궁금하고 꼭 알아야 하는 것들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이다. 다만 거기에 속도와 반복이라는 개념이 붙는다. 다른 부차적인 것들은 그다음에 알아가고 우리가 알고자 하는 가설(방향)에 빠르게 하기 위해 필요한 사항을 최소화하는 것(속력)이다. 즉 속도가 중요해지는 것이다.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이기에 속도를 내서 가장 좋은 길을 찾아내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건 0to1에만 해당되는 게 아니다. 1to10, 1to100 모두 마찬가지다. 완벽을 추구하기 위해 버리는 낭비 중에서 돈도 다시 벌면 되고, 고객도 다시 모을 수 있지만 시간은 되돌릴 수 없다. 그게 가장 중요한 자원이고 가장 공평한 자원이며 가장 무기가 될 자원인 셈이다.
"승빈님 문서가 있었으면 해요"
누군가는 내게 이렇게 말을 하고, 또 다른 이는 내게 이렇게 말한다.
"승빈님 스쿼드는 정리가 잘 되어 있는데 저는 잘 못하겠어요"
왜 이런 차이가 생길까? 사실 문서의 내용은 뭐가 없다. 가설과 기대 효과만 적혀있고 그래서 필요한 것들 중 내가 생각하기에 꼭 있어야 하는 것과 있으면 좋은 것들로 채워뒀다. 언제든지 변할 여지가 있는 것들이기 때문에 이제 여기서부터 문서는 스쿼드원들이 수정도 하고 같이 의견도 낸다.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러닝 쉐어이다. 그래서 결과가 어땠고 이 실험의 결과 다음에 해야 하는 일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만 잘 나열되어도 된다. 시작은 누구나 원대하다. 성공이든 실패든 결과를 가져오고 빠르게 학습하고 다음을 만드는 곳은 원대한 결과를 가져온다.
Footno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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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quest For Proposal, 특정 프로젝트나 사업을 수행하기 위해 기술과 솔루션, 가격 등에 대한 포괄적인 제안을 공식적으로 요청하는 제안요청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