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ungbin's blog
Published on

일을 해낼 수 있는 환경 #2

"회의 어떠셨어요?"

대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유쾌하진 않죠. 소모적이라고 느꼈어요."

당연한 것이었고 대표가 같은 회의 자리에 있었으면서 몰랐을리가 없다.

"그 분이 그래요. 뭔가 너무 차가워요. 그렇죠?"

"아뇨. 저는 차갑고 그런건 괜찮은데 논리적이지 않고 수직적, 위계적이라고 느꼈어요."

나는 대표의 뒤에 나올 말들을 알고 있었다. 늘 그랬듯 대표는 한 사람을 무한히 신뢰하며 그가 원하는 것들은 다 해주고 해보라고 하는 편이다. 그에 따른 피해가 발생하면 그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게 이해를 강요한다. 난 이해할 수 없었고 이건 내가 추구하는 일하는 방식은 아니었다.

"어떤 부분에서 그렇게 느끼셨어요?"

대표는 늘 이해를 해오던 나에게서 처음 느끼는 반발감에 되물었다.

"우리는 생각하고 고민하는 주제가 다르고 그 깊이를 갖는 시간도 달라요. 함부로 누군가를 판단하고 평가할 수 없는 이유이고 상대의 맥락을 모른채로 나의 시야각 안에서 우리가 하는 일들을 정의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지금 그분은 그런 평가를 하셨고, 저는 그 배경을 물었는데 묻지 말라고 하면 이건 취조이고 가스라이팅인거예요."

"그렇죠 승빈님이랑 많이 다르죠"

"아뇨. 저와 다른게 아니라 어른스럽지 못하다고 생각해요."

나는 이 부분에 있어서는 물러설 마음이 없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실속없는 모든 말과 행동은 스타트업에게 낭비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기업과 조직의 문제만이 아니다. 내 시간도 그렇게 소비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처럼 말이다.

"큰일이네요. 두 분이 잘 맞았으면 좋겠어요."

"왜요?"

"그 분의 생각을 잘 실현할 수 있는 비슷한 생각을 해낼 수 있는 분이 되어주셨으면 해요. 홍길동2 같달까요?"

대표의 말도 안되는 소리에 당황했고 기분이 나빠졌다. 나는 지금 그 사람의 일 하는 방식과 우리의 환경이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음을 말하고 있는데 그 말의 끝이 나더러 그 사람이 되라는 것이라니 놀라워서 더 이상 말을 이어나가지 못했다.

자리로 돌아와 일을 하는 내내 오고가는 데이터가 궁금한 동료들은 내 자리로 모였다. "승빈님 제가 이런 걸 하려고 하는데 혹시 이런 데이터 보고 계신 것 있으실까요?" "승빈님 이번에 이런 캠페인을 했는데 제품에서의 결과를 보고 싶어요."

나는 내 시간의 2할 이상을 데이터를 보여주는 것에 쓰기 시작했고 집에 오면 내 일을 해내기 바빴다. 그렇게 빈 자리를 메꾸고 당연한 것들을 계속 당연하게, 일을 당연하게 잘 할 수 있게 해주려는 나의 노력들이 조금씩 허망해졌다. 그 순간 뒤에서는 단체로 휴대폰으로 게임을 즐기던 팀에서 웃음 소리가 나왔다. 불과 며칠 전 아이스 브레이킹 한다고 농담을 하며 웃던 우리 팀이 부녀회 잡담하는 사람들 같다고 했던 사람이 말이다.

일자목이 심해 최대한 높이 올려놓은 내 모니터를 뒤에서 보며 어떤 데이터를 어떻게 보는지 얼마나 한심하다 생각했을지 떠오르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결국 데이터를 보기 위해 당시 데이터를 보기 위해 사용하던 Redash를 켜기도 힘들어졌고 눈치보는 일이 많아졌다. 데이터를 보지 않고 의사결정을 하고 직관에 의존하는 건 내가 잘 하는 일이 아니다. 일의 시작이야 직관으로 할 수 있어도 결국 결과는 데이터로 나와야 한다. 그래야 이 길이 맞는지 아닌지 빨리 판단할 수 있고 그게 유일하게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근데 이 하나의 의사결정 기준이 빼버리니 나는 할 수 있는게 없었고 그때 깨달았다.

'여기는 내가 일을 잘 할 수 있는 곳이 아니고, 조직이 내게 요구하는 것 역시 잘 해낼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