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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가 제품의 기준을 바꾼다.
얼마 전 사내에서 해커톤이 열렸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아는 해커톤과 달리 느슨했지만, 즐거웠다. 비개발자로 구성된 팀에서 나는 내 취미를 마음껏 살리며 재밌게 결과물을 만들었다. 누군가에겐 업인 프로그래밍이 내겐 취미인 이유는 일단 내 본업에서 프로그래밍은 경계가 뚜렷하다. PO는 코드에 직접 접근해서 뭔갈 수정하거나 새로 추가할 일이 없다. 애초에 그렇게 할 자격도, 잘 해야하는 일의 속성에 속하지도 않는다. 더 엄밀하게 나의 취미는 프로그래밍이라기 보다는 내가 쓰는 제품의 불만족을 내가 직접 쓸 요량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디자인부터 디테일한 케이스 고려까지 신경쓴다거나 아키텍처에 대한 고민을 깊이 가져가지 않는 편이다.
처음엔 스마트폰으로 그룹웨어 앱을 만들어서 어디서든 일을 쉽게 하려고 했다. 계정 정보를 휴대폰 로컬 스토리지에 저장해놓고 쓰니 매번 로그인하는 번거로움도 없었고 푸시까지 받을 수 있게 구성했더니 쾌적하게 일할 수 있었다. 그러다 태어날 아이에게 미리 쓰는 일기장을 만들었고, 와이프가 쓸 수유일지와 아기 기저귀 일지 등을 넣기 시작했었다. 가족들이 함께 볼 수 있는 포토앨범이 만들어졌고, 그러다보니 소문이 나면서 매주 5천명의 사용자가 들어오는 앱이 되어 있었다. (지금은 사라진 서비스지만)
그리고 시간이 흘러 가족 주식 포트폴리오 관리 앱을 만들었다. 도미노라는 앱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서비스 종료가 공지됐다 사라지는 등 언제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였다. 기록이 사라지면 다시 두 아이의 증권사 앱에 로그인을 반복하며 어딘가에 기록해야 하는데 대체제가 마땅치 않았다. 토스조차 타사 자녀 증권 계좌를 연동하진 않는다. 내가 생각해도 비즈니스적으로 돈이 된다거나 비용 효율적이지 않다. 법적으로는 복잡해지고 매매도 안되는데 이들의 정보를 가져올 이유도 희석된다. 그래서 어디선가 가져오지 않고 수기 관리하게끔 했다. 현재 가격만 나오며 실시간이 중요한 단타성 기록을 추구하지도 않기로 했다. 어차피 나는 장기 투자 관점에서 관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왕 만드는거 모으는 내가 뿌듯할 만한 요소도 추가했고 누가 봐도 이건 장기 투자 앱인걸 알게 하고 싶었다. 이상한 기대를 갖고 문의가 들어오면 내적갈등만 생긴다.
이 두 앱의 차이는 시간이다. codex와 함께한 두번째 제품은 2주도 걸리지 않았었다. 스펙과 규모는 거의 비슷하고 둘 다 ios 앱인데 이토록 차이가 났던건 codex 하나다. 피그마나 스케치와 같은 디자인툴도 사용하지 않았고, 적절한 라이브러리나 애니메이션에 대한 고민도 줄었다. 2개월에 걸쳐 만들어지던게 2주만에 만들어지는 경험을 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AI가 들어오자 내가 주로 문서를 작성하던 것도 마크다운으로 넘어갔고, 마크다운 뷰어들은 유료가 된 상태였다. 이럴거면 내가 만드는게 낫겠는데 생각하고 만들었고 누적 사용자가 전세계 만명이 넘었다. 심지어 기부도 받는다.
지금은 운동 앱을 만들고 있다. 내가 원하는 조합과 구성이 필요한데 유틸리티들을 개별로 사용하거나 유료 결제가 많이 필요하다. 나는 개발자 프로그램에 어차피 돈을 매년 내고 있기 때문에 그냥 내가 개발해도 구독 비용을 회수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구사항은 생각보다 간단하지 않았다. 애플워치 단독 동작이 가능하며, 저작권 문제 없는 음악 재생, 코치 음성과 건강 기록, 위치 정밀 추적 등 모든 기능이 갖춰져야 했다. 근데 단 이틀만에 디테일한 부분을 손보고 곧 출시할 정도가 되었다. 물론 중간중간 직접 들어보고 피드백도 해야 했고 써보면서 불편한 것들을 말하거나 지금 우리가 사용할 수준의 오픈소스 모델도 찾아서 알려줘야 했다. 이런 스펙들을 정의하는건 내겐 익숙한 일이다. 매 업무마다 해왔던 일이다.
이번 해커톤에서 이런 취미가 그대로 녹았다. 예전 같았으면 상상도 못했을 레트로 게임을 이틀만에 만들었다. 개발자는 한명도 없는 조에서 제품을 만들고 홍보 영상까지 만들었다. 너무 자질구레한 기능을 소개하는 바람에 본선 진출도 못했지만 뚜렷한 교훈을 얻었다. 이런 식이면 곧 내가 쓸 제품을 내가 만들어서 쓰는 시대가 오겠구나. 홈페이지 정도는 내가 만드는 시대가 지금이라면 B2B SaaS가 곧이고 직후에는 B2C 제품들이 이런 시대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이제 제품의 속성은 보여지는게 아니라 각자 자기가 쓸 제품을 직접 만들고 공유하는 시대가 될 것이다. 대 오픈소스의 시대가 되거나 로블록스처럼 사고 파는 구성이 될 것이다. 초개인의 시대가 되며 초거대 플랫폼만 살아남을 것이다. 무언갈 만들기 위한 인프라는 더 공고해질 것이며 수요가 몰리니 더 비싸질 것이다. 나의 자산을 위해 더 신중해지는 시기도 올 것이다. 그 말은 인프라와 플랫폼의 시대라는 소리다. 그 중심에서 AWS는 단연 독보적인 존재가 될 것이다. 가격 공포에서 벗어나게 하고 지금 보다 더 쉬워지기만 하면 된다. 마치 코드를 보고 작성하는게 어려웠던 것처럼 인프라가 그렇다. SW 개발의 접근성이 더 좋아지고 진입 장벽이 낮아졌으니 이제 인프라가 진입 장벽이 됐고 인프라가 중심이 될 것이다.
누구나 AI가 시키는대로 firebase나 supabase에 연동하고 있다. 일반인이 쉬운게 아니라 AI가 쉽게 붙을 수 있는 것들을 사람에게 제안하고 돈을 지불하게끔 하고 있다. miniMax도 오픈소스로 공개해놓고 속도가 느리고 답답하니 자신들이 제공하는 인프라 안에 사람들을 불러 모으려고 한다. 우린 그런 시대에 살고 있다. SW 시대의 끝에서 우리가 가야 할 방향이 꼭 그쪽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누구도 못 쫓아올만큼 깊이 있는 슈퍼SW를 만들거나 더 깊고 어려운 문제를 해결한 제품을 제공하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그 격차는 더 빠르게 줄어들 것이다. 경제는 다르게 흐를 것이고 다르게 흐름 속에서 우린 새로운 기회를 찾아야 한다. 먼 이야기가 아닌 것 같다.